이 세상 모든 이들이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걸음의 수가 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일 아침 새로 주어진 걸음의 수를 생각하며 눈을 비비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으로 콩콩 뛰어가며
잠에 취해 목적없이 돌아다녔다면 그날의 세수는 포기해야겠지.
집 문 밖으로 나서 버스를 타기 위해 가는 길에도
언제나 마음속으로 걸음을 세며 걷고,
지나가는 행인과 인사하다 여태 걸어온 숫자를 잊을까 두려워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숫자를 세겠지.
하나. 둘. 셋. 넷...
마흔 일곱. 마흔 여덟...
걸어야 하는 일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사람들은 항상 앉아 있게 되며,
반가운 친구를 만나도
차마 다가가지는 못한 채
멀리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할꺼야.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TV를 키면
시기 적절치 못하게 횡단보도를 걷는 중 하필 걸음의 수를 다 써버려,
특정 거리가 막힌다는 둥,
심지어 무작정 달려오는 차를 바라보기만 하다 눈을 질끈 감아버린 사람들에 대한
슬픈 소식만 가득 들려오겠지.
술에 취한 아저씨들은 길거리에 잠들어 버리고,
오늘 치 걸음을 다 써버린 아주머니들은 차마 발도 동동 구르지 못한채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새버리지.
발을 헛디뎌 넘어지게 됐다면, 무릎의 멍 보다 더 큰 안타까움이 생길거고
시장에서 저녁거리를 사오는 어머니들의 발걸음은 몹시도 숭고할꺼야.
학교에서 어떤 학생들은 무서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제자리에서 뛰게 되고,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을 업어오기 위해
부모님들은 슬픈 눈망울로 텅빈 교실에 들어올꺼야.
사랑하는 연인들은
매일 아침 서로를 위해 소비할 걸음의 수를 따로 구분 짓고,
어쩌면 낙엽 수북한 가을 거리에 손 잡고 걷는 것은
특별한 기념일에만 하는 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지.
음악에 맞춰 나타난 신부들의 한걸음 한걸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엄숙하고 의미있는 행동일꺼야.
그리고 이혼하고 각각의 방향으로 가버리는 부부들은
그만큼 더 안타깝겠지.
귀여운 여자친구들은 자기를 위해 얼만큼의 걸음을 쓸 수 있냐고
전화너머로 칭얼 댈테고
바보 같은 남자친구들은
졸지에 여자친구의 창문 밖에 서서 아침이 올때까지 멀뚱멀뚱 기다릴지도 몰라.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은 이들은
저기 저 멀리 가버리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
몇 걸음 주춤 주춤 따라가다가도,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마음을 접고 돌아갈 것이며,
간혹 미련을 못 버리고 쫓아가고 쫓아가다가,
끝내 잡지 못한 이들은,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모두 바쁜 거리 한복판에 꼼짝도 못하고 서있게 될꺼야.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 역시,
처음 떨어졌던 그 거리 그대로 유지한 채,
여전히 뒷모습만 보이고 있겠지.
지나가는 어린 꼬마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고,
백발의 노인들은 입에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한땐 나도 저렇게 정열적으로 사랑했던 때가 있었지'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한 불행한 세상에서 내가 너를 본다면
주저없이 너에게 달려가는 나의 이 마음은
얼마나 더 의미 있으며,
너 역시 나를 보고 달려오는 마음은
얼마나 더 소중할까.
차마 그 한걸음 떼기 아까워,
멀리서 큰소리로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그 시끄러운 거리에서
나는 그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귀에 속삭이는
이 소소한 행복들이
얼마나 더 의미 있을까.
곰이불
2009/09/29 05:31
2009/09/29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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